웹진 믿미 2022년 가을호 Vol.7
어떤 가족
완결이 아니라 미결인 채로 
이소정

 비가 오는 저녁이었다. 학교에서 귀가하던 길이었다. 동거인과 나는 아직 같이 살기 전이었고, 각자 우산을 쓰고 있었다. 동거인이 우산 너머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성인이 된 후로 연인이 아닌 사람과는 손을 잡고 걸어 본 적이 없었고 게다가 우리는 그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손을 잡고 걷다니, 웃긴 일이군. 우산 바깥으로 튀어나온 두 손 위로 빗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손이 계속 젖어 오는데 어떻게 놓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계속 잡고 있었다. 우리는 손바닥이 젖은 채 한참을 걸어 집에 도착했고, 같은 건물 위층과 아래층에 살고 있던 동거인과 나는 각자의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거인과 함께하는 삶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되짚어 보니 그 장면이 떠올랐다. 우산 바깥으로 튀어나와 빗방울에 축축이 젖어 가던 손바닥의 감촉이.

동거인과 한집으로 이사 온 첫날, 냉골 같은 방에 간단한 짐을 풀고 쪽잠을 자려고 하는데 위층에서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집안에서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의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생경했다. 이제 집은 안녕, 잘 자, 내일 봐, 하고 현관문을 닫고 나면 세상 혹은 타인과 단절되는 공간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위층과 아래층을 연결하는 계단 너머로, 나를 근원지로 하는 게 아닌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을 구기거나 접는 소리, 서랍 문을 여닫는 소리, 수도꼭지를 틀었다가 잠그는 소리,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소리,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 같은 것들이었다. 우려했던 대로 층간소음 문제가 불거지겠다고 생각했다.

고요는 나에게 익숙한 언어다. 일상에서 나는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듣거나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를 듣는다. 어떤 일요일 아침에는 거리가 너무 조용해서 깨기도 한다. 그러면 고요가 깨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귀를 기울인다. 내 몸의 주파수나 진동 같은 것이 있고 고요에도 주파수가 있다면, 아마 내 주파수와 고요의 주파수는 비슷한 모양일 것이다. 형제자매가 없는 나는 어릴 때부터 조용한 집에 있는 것이 익숙했다. 침묵을 깨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것이 저절로 깨질 때까지 기다렸다. 조용히 집 안을 돌아다녔고, 그 안에 더 조용한 요새를 지었다. 책을 읽을 때는 묵독을 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이야기는 침묵 안에서 발생했다. 고요 속에서 생각이 흘러가는 것을 듣거나 생각이 가라앉는 것을 듣는다. 에너지가 평형 상태를 이루듯 바깥의 고요와 내면의 고요가 비슷해진다. 그러면 내가 다시 나로 돌아온 것 같았다.

동거인은 다양한 소리를 내는 사람이다. 기쁠 땐 깔깔깔 웃고 신이 나면 속사포 랩처럼 말한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고양이에게 보고하고 고양이의 일거수일투족에 훈수를 두기도 한다. 하루는 고양이의 장난감을 던져서 선반 밑에 들어가게 해놓고 ‘미안~’ 하고 의자에 앉으면서 차이코프스키 음악에 맞춰 ‘딴딴 따라라라 딴 따라’, 했는데 그땐 인간 자체가 음표로 만들어진 사람 같았다. 음악을 사랑하는 동거인은 집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에 음악을 들으면서 보내는데, 덕분에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늘 아름다운 소리를 듣게 된다. 우울하거나 기분이 영 구리거나 어쩌면 단지 침착할 뿐인 순간에도 감정을 극대화하거나 건드리는 음악을 듣는다. 그래서 가끔은 동의한 적 없는 영화에 출연하고 있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아침에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할 때 Mikael Karlsson의 Second Line이 들려오면 마치 전장에 나가는 군인처럼 비장한 마음이 된다. Art of Noise의 Yebo!를 들으면 처음 보는 사람들의 축제에 잘못 초대됐지만 어쨌든 즐거워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드보르작의 Song to the Moon은 내가 누군가의 집 창문 아래에 서 있는 것처럼, 그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만든다. 팽창했다가 사그라지는 감정이나 기분의 동요 없이 시간과 생각의 경비원처럼 살았던 나의 일상은 매일 다르게 울려 퍼지는 음악 덕분에 매일 다른 날이 된다. 빵과 시리얼로 대충 때웠던 식단은 찌개와 여러 개의 반찬과 볶음 요리로 채워진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게 되었다. 가끔 늦잠을 잔다. 날씨가 좋을 때면 작업실 밖으로 나가 천변을 따라 걷거나 자전거를 탄다.

어느 날에는 무척 불안하고 심란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잘 해내고 싶은 일에 대한 걱정이 꿈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걱정은 실제로 해결해 주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도 체력과 에너지를 쓸데없이 많이 소비하게 한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걱정과 걱정에 대한 걱정에 파묻히면서 방문을 열었는데 위층에서 동거인이 작게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원형 계단과 살짝 열린 방문 틈 사이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걸 듣고 있으니까 왠지 모든 것이 갑자기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오늘도 내일도 동거인과 같이 누룽지를 끓여 먹고 복숭아를 깎아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요즘은 가끔 내가 편하다고 느끼는 다른 사람과 있을 때 문득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아직 내 손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이 먼저 왈칵 다가가는 것을 느낀다. 그럴 때면 나한테 없던 것 같은 마음이 생겨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먼저 다가가고 싶은 마음. 궁금해하는 마음. 듣고 싶어 하는 마음. 동거인과 같이 사는 삶을 통해서 나는 환대하는 마음이 방사형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두 사람 사이에서 메아리치며 울리는 듯한 관계의 형태도 사실은 두 사람의 바깥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에게 생겨난 마음이 동거인에게서 왔다면 동거인이 주변에 나누어 주는 크고 작은 호의들은 그에게 사랑을 나누어 준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서 왔을 것이고, 그 사람들 또한 수많은 사람과 사랑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평생 나와 마주칠 일이 없었을 사람들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환대하는 마음이 고여 있지 않고 무한히 퍼져나가는 것을 상상한다. 어떤 관계들이 이곳저곳에서 완결이 아니라 미결인 채로 퍼져나가기를. 그래서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모르던 사람들과 닿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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